하버마스와 하이데거 / 이황과 기대승

나름 지성사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이데거와 하버마스의 관계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이미 중고생 때부터 광범위한 철학적 독서를 시작했던 하버마스가 하필이면 마틴 하이데거에게 의지했던 것은 그의 성장사의 역설에 속한다. 하이데거는 - 우리가 늦어도 『흑서』의 출판 이후에는 알게 되었듯이 - 자기 정당화에서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하버마스가 1950년대 초부터 Fankfurter Allgemiene Zeitung (이하 FAZ)와 다른 신문에 기고했던 서평, 연극비평 그리고 시대진단 에세이들은 분명하게 하이데거의 음조를 띠고 있다.

그는 철학의 과제는 “존재의 역운(Geschick)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 말했고, “자기주장, 길들이기, 계획적인 관철의 실존”을 비난했으며, “우리는 ‘사물들’에 대한 올바른 관계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시대의 흐름에 대한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의 이원론으로 번역했다. 하버마스는 “아직 여전히 대학의 틀을 규정하고 있는” 노장 교수들에게 낙후된 독서 수준을 끌어올려, 하이데거와 “내실 있는 토론”을 벌이라고 요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동년배들 전체를 “전회(轉回)의 행위”로 인도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인간은 사물들에 대해 귀 기울이는 태도를 지녀야 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대신에 그들로 존재하게 허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중략)

다른 사람도 아닌 하이데거가 자신의 정치적 전력을 새롭게 평가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알고 하버마스는 크게 실망했다. 하이데거가 1953년에 과거 1935년에 행한 강의록 “형이상학 입문”을 출판한 책에서 나치즘의 “내적 진리와 위대함”에 대해 말한 것을 변함없이 유지했다는 사실을 계기로 하버마스는 자신의 사표(師表)로 여겼던 사상가를 FAZ에서 비판했다. “오늘날 모두가 알게 된 수백만의 인간에 대한 계획적 살인도 운명적인 오류로서 존재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질문했다.

이 질문으로 하버마스는 바로 그 해에 탁월한 논쟁가로서 서독 공론장의 무대 위에 등장했다. 그가 하이데거와 손절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리라. 그의 비판의 요점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 들어 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오류를 완고하게 정당화함으로써 독일 사회 전체의 병리학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이며, 그래서 그는 시간성에 대한 자신의 획기적인 이해, 즉 과거를 “아직 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 때때로 문제 삼으라는 요구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매우 일반적으로 말하면, 하버마스는 하이데거에서 그의 스타일과 대조되는 내용, 즉 정치적 적용의 천박함과 대조되는 『존재와 시간』의 범주들 자체는 옹호했다. 그의 변증법적으로 세련된 결론에 따르면 이제 “하이데거를 하이데거에 반해서” 사고해야 할 때이다.

앞에서 언급한 야콥 타우베스는 이러한 전환에서 이미 “전체 하버마스”를 인식하려 했다. 이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입장이다. 데카르트 전통의 고립된 주체를 이미 관여된 세계-내-존재로 해소했던 현존재 분석을 통해서 하이데거는 포스트 형이상학적 사고의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가다가 말았다. 그는 인간의 실존을 쓸모(또는 적소성, Bewandtnis)의 관계로서 이해할망정, 의사소통의 관계로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이데거의 영웅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타인과의 상호이해는 “세인(世人, das Man)으로의 퇴락”이라는 비참한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는 현존재의 상호작용적 차원을 인식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실패를 회복하는 일은 그의 독자인 하버마스에게 남겨진 과제였다.

그런데 하이데거 자신은 어떠했나? 자신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을 읽은 FAZ의 독자[하이데거]는 “하버마아스(Habermaas)”가 무명의 24세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했다. 그는 반론을 쓰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그 후부터 “일부러 어떤 신문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1953년 8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했다.

하버마스가 FAZ에 기고한 글은 대상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지만, 젊은 대학생의 패기있는 기고문을 유심히 지켜보던 프랑크푸르트의 어떤 학자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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