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독창적이고, 흥미롭고, 복잡하고, 어려운 책"
Richard Rorty, "Reviewed Work: Traditional and Analytical Philosophy: 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Language by Ernst Tugendhat", The Journal of Philosophy, Vol. 82(12), 1985, p. 720.
여름 방학 동안 저의 개인 프로젝트(?) 중 하나로 투겐트하트의 『전통적 철학과 분석적 철학(Traditional and Analytic Philosophy)』 완독하기가 있었습니다. 이 책을 석사 시절에 김영건 교수님의 「하이데거와 분석철학: 카르납, 로티,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논문을 통해 처음 알게 되어서 완독을 위해 여러 번 도전하였는데, 이제서야 겨우 책의 전체적인 면모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네요. 그동안 투겐트하트의 주요 논문들은 꽤 살펴보았고, 산티아고 자바라(Santiago Zabala)가 쓴 『분석철학의 해석학적 본성(The Hermeneutic Nature of Analytic Philosophy)』이라는 투겐트하트 철학 연구서도 몇 번씩이나 읽었지만, 『전통적 철학과 분석적 철학』을 완독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로티의 표현대로, 이 책은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면모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투겐트하트는 이 책에서 언어에 대한 소위 '객체 지향적 접근(object-oriented approch)'을 비판하고자 합니다. 대상이 언어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철학, 그리고 그런 대상에 언어적 기호를 개별적으로 할당할 수 있다고 보는 철학의 기획을 비판하고자 하는 거죠. (투겐트하트의 맥락에서는 후설이 이와 같은 '객체 지향적' 철학의 대표자로 지목됩니다.) 즉, 대상이 어딘가에 미리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그 대상을 언어 이전적으로 지시할 수 있으며, 언어란 단지 이와 같은 지시 이후에야 대상에 할당되는 기호일 뿐이라는 식의 입장이 투겐트하트가 극복하고자 하는 '전통적' 철학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투겐트하트가 하고자 하는 모든 주장은 결국 아래의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기호로부터 자유로운 대상(개체) 지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Ernst Tugendhat, Tranditional and Analytic Philosophy, A. Gorner (tra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p. 380.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 자체는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가다머, 데리다, 셀라스, 브랜덤 등 다른 수많은 철학자들도 제시한 것이죠. 투겐트하트가 기존 입장들과 구별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투겐트하트는 이 주장이 '언어분석'의 과정을 통해 제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게다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탐구하고자 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존재론의 선험적(a priori) 탐구가 결국 '형식적 의미론(formal semantics)'이라는 언어분석적 전통에서 완성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죠. (책의 제1부가 이와 같은 철학사적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둘째로, 투겐트하트는 술어문(predicative sentence)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의미론을 구성합니다. 'Fa'라는 형태의 언명을 분석하면서, (a) 'a'라는 단칭어가 공간-시간적 동일화(identification)의 기능을 한다는 점, (b) 'F'라는 술어가 특징화(characterization)의 기능을 한다는 점, (c) 'a'라는 단칭어와 'F'라는 술어의 결합인 'Fa'라는 문장의 의미가 '검증 게임(verification-game)'을 바탕으로 해명되어야 한다는 점 등을 제시하죠. (책의 제2부가 이와 같은 의미론적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죠.)
그래서 투겐트하트의 『전통적 철학과 분석적 철학』은 그만의 고유한 철학사적 관점과 의미론적 관점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흥미롭게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출발점으로 삼아 분석철학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을 제시하고, 후설의 현상학을 극복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를 서로 엮고, "낱말의 의미는 의미의 설명이 설명하는 것이다."(『철학적 탐구』, §560)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격언으로부터 출발하여 설과 그라이스, 데이비슨과 더밋, 스트로슨과 러셀을 가로지르면서 의미론의 문제들을 논의하죠.
이러다 보니, 이 책은 독해를 위해 정말 수많은 배경 지식과 끈기를 필요로 하는 책이었네요. 특별히, 의미론적 논의가 전개되는 제2부는 언어철학의 전문적인 논의에 대한 선이해를 상당히 많이 요구해서 공부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게다가 책 내용이 후반부로 갈수록 한 문장의 길이가 점점 더 길어지더라고요.) 투겐트하트가 2023년에 사망하였을 당시 Daily Nous의 추모 기사에서는 『전통적 철학과 분석적 철학』에 대해 "언어 (분석적) 철학에 대한 역사적으로 정향된 논고"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이런 표현은 기껏해야 '절반만' 맞을 뿐입니다. 이 책의 제2부는 '역사적'이기보다는 '의미론적' 주제를 다루고 있고, 역사적 주제를 다루는 제1부보다 의미론적 주제를 다루는 제2부가 분량상 훨씬 길 뿐더러 내용면에서도 훨씬 중요하거든요. (사실, 제1부조차 본격적인 의미론을 다루기 위한 '방법론적' 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책 내용이 상당히 흥미롭기는 한데, 완전히 동의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투겐트하트는 굉장히 '구성적'인 철학자라, 단칭어의 지시체, 술어의 기능, 문장의 진리 조건 등에 대한 기존 의미론적 가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다시 입증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거든요. 투겐트하트의 박사논문 주제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고, 교수자격 논문 주제가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이었던 점에 비교해 보면, 이 책의 논의 전개 방식은 정말 놀랄만큼 주류 분석철학자들의 스타일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스타일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저는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의 '해체적' 철학을 선호하다 보니, 투겐트하트의 '구성적' 의미론이 다소 답답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또한, 그의 의미론이 공간-시간적 물체를 지시하는 단칭어와 그 단칭어가 포함된 술어문의 의미론을 해명하는 데 중점을 맞추고 있다 보니, 추상적 단칭어가 포함된 문장의 의미론이라든가, 비술어적 문장(명령문, 의문문 등)의 의미론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는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걸리고요.
그렇지만 여하튼 방학 중에 정말 어려운 책 한 권을 나름대로 독파해내니 뿌듯하네요. 언젠가 꼭 이 책에 나온 내용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논문을 써보려고 합니다. 제 전공이 철학적 해석학이고, 그 중에서도 해석학적 철학과 분석철학 사이의 관계가 저의 주된 관심사인 만큼, 하이데거의 마지막 제자로 출발해서 결국 분석철학자가 된 투겐트하트는 공부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인물이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투겐트하트식의 '분석적 해석학'이 지닌 의의를 잘 살려내면서도, 그의 철학의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항상 고민 중입니다.